컵의 손잡이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 124쪽
한 달 전쯤 국회도서관으로부터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의 서평 작성을 부탁받았을 때 저는 매우 기뻤습니다. 그때 마침 저도 얼마 전에 소천하신, 제 선배 교수님의 선배 교수님이신 이어령 선생님을 기리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받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은 죽음을 마주한 선생님의 평생 지혜를 응축하고 있었고, 저의 정신과 영혼을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 다가갈수록 선생님을 직접 뵙지 못했고 영영 뵐 수 없다는 사실에 점점 마음이 아파 왔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서평을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수많은 가르침이 녹아 있는 책을 간추려 평하는 일은 그 크고 깊은 의미를 얄팍하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서평을 쓰기로 했기에 어떤 글을 쓸까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저에게 가장 따뜻한 울림을 준 가르침을 하나 소개해보기로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획일적으로 살아가는 집단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선생님께서 지적하는 과정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다른 사람이나 사회 일반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은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안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는 진정한 개인들 사이에서(inter) 서로 손잡는 생활이 가능하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때 사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선생님은 컵의 비유를 드신 것입니다.
컵은 사람을 나타냅니다. 컵에 손잡이가 달린 것과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두 종류의 사람, 즉 손을 내미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자신을 뭔가로 채운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다른 점은 손잡이가 달린 사람이 그렇게 채운 것을 다른 사람도 쓸 수 있도록 주려고 하는 데에 반해 손을 내밀지 않는 사람은 줄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남에게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 사이의 차이를 말하려고 선생님은 컵 손잡이를 이야기하셨고, 이어서 그 손잡이, 즉 내미는 손이 누구의 것인지 물어보신 것입니다. 손을 내미는 나의 것일까요? 그 손을 잡는 남의 것일까요? 손은 당연히 그것을 내미는 내 몸에 달린 나의 것이지만 내게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손이 절실히 필요해 잡는 남에게는 큰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손은 나의 것이면서 동시에 남의 것이 됩니다. 즉, 내미는 손은 두 사람 사이의 것입니다. 이러한 사이가 많을 때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며 공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컵 손잡이 가르침을 받은 저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제가 그동안 손잡이가 없는 사람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안 주면 집단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과 진정으로 함께 살려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던 것입니다. 앞으로 저는 여러 손잡이를 달려고 합니다. 두 번째 생각은 선생님께서 남긴 책(말씀과 글씀)이 저를 포함한 독자들에게 내민 손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책을 읽는 일은 선생님의 손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선생님은 몸이 매우 아파 돌아가실 때까지 많은 손잡이를 다셨습니다. 그것들은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도 지금 그 손잡이를 하나 쥐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신 선생님께서 우리의 손길을 느끼시며 외롭지 않게 편안히 쉬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