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서평

이 책은 네이버 문화재단이 기획한 강연 ‘바른 사회와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성찰’을 모은 것이다. 다섯 개의 세부 주제로 이루어진 강연의 전체적 질문은 ‘좋은 정치적 삶(the good political life)은 어떻게 가능한가’로 압축된다. 정치의 공간이 국가이므로, 달리 말해 ‘국가 안에서의 좋은 삶(the good life in state)’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김우창 교수의 강연 “윤리와 인간의 삶”은 공동의 삶에서 윤리는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가능한가를 탐색했다. 오늘날 사람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흔히 정치와 경제라고 한다. 이때 놓치는 것 중 하나가 윤리이다. 윤리는 삶 전체를 다스리는 틀이자 삶의 규범이다. 그런데 윤리의 최종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동양사상에서 윤리의 근거는 착한 성품이다. 맹자의 측은지심이 그런 것이다. 흄도 감정의 선차성(先次性)을 강조했다. 하지만 윤리는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 혹은 정당화가 필요하다. 이성적 일반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 개념은 도덕과 윤리를 감정으로부터 해방시켜 법칙의 차원에 놓으려는 시도이다. 이런 탐구를 통해 인간은 사물과 감정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자율적이며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동정심 같은 선한 감정은 이성에 의해 규범화되어 윤리가 되고, 임계적 사고에서는 법이 된다. 자기완성과 타인의 행복을 동시에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상승이다. 박성우 교수의 강연 “희랍 고전시대의 국가이념”은 아테네 민주주의와 그 쇠퇴 원인을 다루고 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성기에는 엘리트의 헌신과 데모스(고대 아테네의 최소단위 행정구역)의 참여가 균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균형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 엘리트의 선동과 대중의 영합 때문에 붕괴하였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처럼 공공선(公共善)에 헌신하는 리더를 대안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공공선의 실천을 넘어 시민의 영혼을 개선하는 철인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주경철 교수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서양의 유토피아 논의, 구체적으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검토했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산주의 사회와 닮았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이상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모순도 경계했다. 베이컨은 과학기술이 가져올 유토피아를 그렸다. 모어는 ‘욕망 억제’의 유토피아를, 베이컨은 ‘욕망 충족’의 유토피아를 묘사했다.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인류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이상익 교수의 “유교 윤리와 국가”는 유교의 국가론과 통치윤리를 다루었다. 유교는 통상적으로 억압적인 윤리와 부패한 정치의 근원으로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이 강연은 이런 선입견을 완전히 전복한다. 유교에서 국가의 기원은 천명(天命)에서 계천입극(繼天立極)으로 발전해왔는데, 그 요점은 자연상태의 혼란과 결핍을 극복하고 백성의 안전과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국가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는 백성을 가장 중시하고, 백성의 의견을 폭넓게 청취하는 대동(大同)민주주의를 추구했다. 이는 현대 정치의 부패와 사회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인륜을 통한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데 시사점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의 “국가의 현실, 개인의 현실”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검토하고,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고 있다. 현대 실존주의나 독일 낭만주의의 전통은 개인의 내면적 생활을 동경한다. 하지만 개인이 어떤 내면적 세계를 추구하든 정치를 통한 집합적 결정의 결과들에 의해 삶의 조건이 규정된다. 위대한 문화적 전통과 활기찬 경제를 보유한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비극을 겪고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것도 정치에 대한 무관심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국은 지난 세기 커다란 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겪었지만, 강력한 국가를 재건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였으며 산업화와 민주화까지 달성했다. 하지만 국가 건설의 시기에 자유주의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는 시민사회의 미성숙을 초래했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이에 기인한다. 이를 해결하려면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정당정치의 성숙이 불가결하다. 이상의 논의를 다시 음미해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깨어있는 이성’으로 생각된다. 좋은 정치적 삶을 위해서는 단순한 선의, 또한 공공선에 대한 단순한 헌신을 넘어서야 하며, 단순한 유토피아적 이상도 넘어서야 한다. 인륜도, 시민사회도 이것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깨어있는 이성’만이 자신과 타인을 상승시킬 수 있다. 이 세상을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로 만드는 것은 결국 이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