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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선의 잡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소한 일에도 이렇듯 깊고도 다양한 사상적 배경이 어우러져 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옛것은 온당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106p.) 이 책은 조선 최초의 세시풍속지인 유득공의 『경도잡지』를 새롭게 해석한 책이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에도 잡지가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신문 이외의 정기간행물을 잡지라고 부른다. 네덜란드어의 ‘magazien’에서 비롯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1896년 유학생 잡지인 『친목회회보』나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대조선독립협회회보』, 근대적 잡지 형식을 갖춘 최남선의 『소년』의 출현으로 본다. 따라서 조선 시대 출판은 내내 국가에서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경도잡지』는 특정한 기준에 맞추어 항목을 구분하지 않고 서울의 풍속과 양반의 생활상을 섹션별로 그려낸 책인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 하면 으레 예의와 격식을 차리며, 의젓하고 점잖게 유교 경전을 읽는 모습을 떠올린다. 실제 조선 시대 양반은 지배계층으로서 다른 신분에 비해 많은 특권을 누렸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에서 정국을 이끌고, 경제적으로는 지주로서 농민을 지배했으며, 17세기 이후에는 군역을 면제받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무를 피하기도 했다. 특히 18세기 이후 조선은 정치적 혼돈과 함께 경제적으로는 전국의 상권이 확대되고, 사회적으로는 한양에 인구가 집중되며, 문화적으로는 그림, 시, 가사 등 외래문화 영향이 큰 시기였다. 책은 신분제와 위계질서가 철저했던 조선 후기에 지배층이었던 한양 양반들의 의식주 문화와 취미, 기호를 짚어보며, 문인들의 취향과 과거 등의 일상생활을 낱낱이 파헤친 대중적 교양서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조선 시대 생활사 서술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몇 년간의 자료 수집과 집필 내공이 고스란히 담긴 결과물을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취향’이라는 부제로 출간했다. 특히 그 시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원판 사진과 풍부한 관련 자료의 해석은 양반들의 생활 풍경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문적 지식에 갇히지 않고 대중독자층으로 행동반경을 넓히려는 작가의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책은 『경도잡지』의 ‘풍속’ 편을 전체 4장으로 새롭게 해석하였다. 책의 1장에는 『경도잡지』의 풍속편 19개 항목 중 건복(巾服), 마려(馬驢), 혼의(婚儀), 가도(呵導), 유가(遊街) 등을 묶어 양반들의 쓰개와 의복의 종류, 말과 나귀 등의 탈것, 장가가고 시집가는 행렬, 양반의 행차, 그리고 과거 급제 축하연 등을 담고 있다. 권위와 격식을 앞세웠던 양반들의 체면 중시와 조선 시대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또한 천 원권 지폐에 그려진 퇴계 이황의 복건 착용과 송시열의 복건 차림의 초상에 대해 저자는 역사적 고증의 중요성과 함께 사상・문화사적으로 깊이 따져보아야 할 문제라고 말한다. 품에 살고, 품에 죽는다는 사치 풍조와 명품을 선호하는 양반들의 취미 생활을 담고 있는 2장은 제택(第宅), 문방(文房), 화훼(花卉), 발합(鵓鴿) 등을 엮어 집과 방의 장식품, 문방을 구성하는 여러 물건의 해석을 담아냈다. 유행에 집착하는 풍조와 허영심, 사치, 명품을 선호하는 양반들의 욕망의 선을 들춰내며, 비둘기를 키우는 등 호화 취미를 가진 마니아층 양반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주식(酒食), 다연(茶烟), 과와(果瓜), 기집(器什), 시포(市舖)로 구성되는 3장에서는 술, 차, 담배, 과일 등 기호품에 얽힌 내용과 놋그릇의 사용, 그리고 주요 시장의 모습과 거래 품목을 둘러싼 주제를 부연, 첨가, 정리하였다. 특히, 사물에 대한 지극한 기품을 중시하며 사용가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모습은 서울 양반들이 격조 있는 생활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 4장에선 『경도잡지』의 유상(遊賞), 노래와 광대(聲伎), 시문(詩文), 서화(書畫), 도희(睹戱)로 봄철 꽃놀이 장소와 연주・춤・연극의 실상 그리고 읽고 지은 글들과 즐겨 감상한 글씨와 그림, 이면의 투전판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책은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와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꽤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당시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원문 텍스트의 골격에 살을 붙여 해석한 점, 고전 텍스트의 번역과 주석의 방식에서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새로운 예시를 보여준 점이다. 특히 원문텍스트의 번역은 과거의 기록들을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데, 거의 1,000개에 달하는 ‘주’는 하나의 책이 나오는데 얼마나 많은 수고와 공이 드는지를 헤아려 볼 수 있다. 우리는 기록을 통해 당대의 삶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서울 양반 지배층이 향유한 다양한 삶의 모습과 인식, 취향, 그리고 위선과 이중성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당시 지배층의 일상생활 속 욕망을 들춰보니 앞으로 다가올 민족적 시련의 복선도 감지된다. 오래된 미래가 떠오르는 책이다.
조선의 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