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자유인가? : 스티글리츠가 제시하는 진보적 자본주의의 길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종종 정직하지 못한 시민을 만들어 냈으며 신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자유주의는 이름에 자유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에게 의미 있는 자유를 제공하지 못했다. (...) 좋은 경제란 무엇이며 그것과 좋은 사회의 관계는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질문해야 한다.” - 286〜287쪽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의『자유의 길(The road to freedom)』은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가 독점했던 ‘자유’ 담론을 정면에서 다시 묻는다.『불평등의 대가(The price of inequality)』,『불만 시대의 자본주의(People, power, and profits)』등 이전 저작들이 불평등과 공정 문제를 진단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 책은 ‘자유’라는 언어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흥미롭게도 스티글리츠의 책 제목『자유의 길(The road to freedom)』은 밀턴 프리드먼의 고전인『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고전『노예의 길((The road to freedom)』을 의도적으로 차용했다. 프리드먼과 하이에크 그리고 스티글리츠의 ‘자유’ 개념은 극명하게 갈린다. 프리드먼과 하이에크에게 자유는 정부의 간섭이 없는 시장에서 보장되는 것이었고, 세금과 규제는 자유의 적이었다. 반면 스티글리츠에게 자유는 시장을 방치할 때 보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불평등, 금융위기, 정보 비대칭 속에서 ‘잠재력을 발휘할 자유’, ‘번영할 자유’는 제한된다.
1부 “해방과 자유: 기본원칙”은 경제학 교과서의 기본 개념들을 자유의 언어로 다시 번역한다. 외부효과, 공공재와 무임승차문제, 독점은 전통적으로 단순한 ‘시장 실패’의 사례로 설명되었지만, 독자는 교과서에서 반복해 보아 온 개념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접하게 되고 경제학이 곧 자유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의 핵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외부효과는 한 개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공공재와 무임승차문제는 집단적 조정 없이는 다수의 자유가 결코 보장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기업은 소수에게 이익을 안기지만 다수의 소비자에게 부자유를 강요한다. 따라서 스티글리츠에게 자유란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강제적 조정(coercive coordination)’ 없이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관계적 현실이다.
물론 자유는 충돌한다. 스티글리츠는 자유의 충돌을 조율하는 기준으로 존 롤스의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과 애덤 스미스의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 개념을 끌어온다. 독자라면 바로 이 지점에서, 스티글리츠의 책이 단순한 경제 비판서가 아니라 경제학자들의 협소한 자유 개념을 반박하는 탄탄한 철학적 논리를 다지는 사유의 장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부 “자유, 믿음, 선호, 그리고 좋은 사회 만들기”에서는 인간의 믿음, 선호와 선택이 사회적 맥락과 정보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현대 행동경제학의 통찰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의 믿음과 신념은 소셜 미디어, 정치권력, 경제 엘리트의 담론 장악이 생산하는 잘못된 정보와 허위 정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스티글리츠는 오늘날 정보 왜곡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협할 만큼 심각한 상황임에 대해 경고음을 울린다. 더 이상 시장 참여 기회만을 제공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정보의 질과 유통 구조를 바로잡는 것이 실질적 자유의 전제 조건임을 강조한다.
스티글리츠는 이 책을 쓴 궁극적 목표가 3부의 “어떤 경제가 좋은, 정의로운,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 내는가?”를 모색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가 지향하는 체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진보적 자본주의다. 신자유주의는 시장 실패를 시장에 맡겨 해결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진보적 자본주의는 시장의 창의성과 역동성을 인정하면서도, 공공의 규칙과 사회적 투자, 민주적 조정을 통해 자유를 실질화하는 체제다.
스티글리츠가 제시하는 핵심 논지는 그의 이전 저작들에서도 꾸준히 다루어온 주제로, 이 책은 그 논지를 ‘자유’라는 언어로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보다 의의가 있다. 전혀 새로운 분석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다소 아쉬움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러한 재구성이야말로 오늘날의 담론 전장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스티글리츠 사상의 연속성과 더불어, 왜 지금 그가 ‘자유’라는 화두에 다시 천착하는지를 확인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