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노트로 확장된 마음, 쓰는 인간이 변화시킨 세계
“겉면이 파란색인 공책들, 연필 두 자루와 연필깎이(주머니칼은 너무 낭비였다), 대리석 상판 탁자, 이른 아침의 냄새, 비질과 대걸레질, 그리고 행운, 이것들이 필요한 전부였다.” -245쪽, 어니스트 헤밍웨이『파리는 날마다 축제』
1998년 앤디 클라크와 데이비드 차머스는 <확장된 마음(The extended mind)>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핵심 질문은 “마음이 멈추고 나머지 세계가 시작되는 지점은 어디인가?”(498쪽)다. 전통적으로 인지는 피부라는 경계 내부에서, 특히 두개골 안의 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확장된 마음’ 가설은 인간 유기체가 외부 대상과 상호 작용하며 하나의 결합된 시스템을 형성할 때, 이 전체를 하나의 인지 시스템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신의 ‘인지 시스템’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디자인하고 활용해 왔다. 최근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 또한 인간의 인지 과정을 크게 변형한다. 그렇다면 노트 필기는 어떨까? ‘구닥다리’ 기술이니 컴퓨터나 인공지능만큼의 파급력은 없을까?
노트가 바꾼 회계와 회화의 세계
회계 작업을 하는 데 종종 쓰이는 ‘현금출납부’, ‘총계정원장’, ‘장부가액’ 등의 용어는 실제 물리적 장부 즉, 넓은 의미의 노트와 관련이 있다.(39쪽) 이러한 은유의 기원을 따라가면 14세기 초 피렌체에 이른다. 당시 피렌체인은 국제무역의 주역이었고, 상인 조반니 파롤피는 여러 가게를 여는 과정에서 장부 기재 담당 직원으로 아마티노 “마티노” 마누치를 고용했다. 마누치는 파롤피 원장을 작성했는데, 놀랍게도 “처음으로 회계와 관련한 추상적 개념들, 그리고 그 개념들이 즉시 운용되고 사용되는 실무기법을 전부 한번에 볼 수 있는”(46쪽) 장부였다.
최초의 복식부기 및 손익계산법은 종이와의 결합으로 엄청난 변화를 만들었다. 당시 기록을 위해 널리 쓰이던 양피지는 잉크가 표면에 마르는 방식을 취했기에 얼마든지 기록을 긁어내고 다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종이는 잉크가 스미는 방식으로 작동하기에 장부 위변조가 거의 불가능했다. 나아가 대량생산 덕분에 여러 장을 묶어 방대한 장부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영향은 기업 경영의 기본이 되는 현대 회계 시스템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 “양피지와 잉크는 성직자의 전유물”(65∼66쪽)인 경우가 많았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철저히 계급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초로 스케치북을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치마부에의 공로 덕에 대중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일례로 이 ‘묶음 노트’를 활발하게 사용한 이탈리아의 화가 겸 건축가이며 치마부에의 제자였던 조토 디 본도네는 비잔틴 전통에서 벗어나 르네상스 회화를 이끄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종이 노트, 문명사적 변화를 이끌다
종이 노트가 바꾼 세계는 단지 회계와 회화에 그치지 않는다. 15세기 후반부터 작성된 음악 필사본 ‘서가번호 LHD 244’는 합창과 반주 지침은 물론 화성법의 혁신을 담은 중요한 자료로, 세기를 넘어 전승되며 음악 교육과 실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망록은 여러 텍스트를 해체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조합하는 작업을 통해 “사람들이 근대를 살아나가는 방식을 바꿔놓았고”(185쪽), 몰스킨을 고집했던 작가 브루스 채트윈은 “노트를 자유분방한 창작자들의 토템”(255쪽)으로 만들었다. 1831년 왕립해군함 비글호에 오른 찰스 다윈은 겨우 12x8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노트에 그가 경험한 거의 모든 것을 남김으로써 근대 이후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취 중 하나인 진화론을 정립하였다. 현대 기후 과학은 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항해일지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과거 기후에 대한 통찰을 얻고 장기적 기후 변화의 패턴을 추산한다. 기록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고 있다.
문자의 혁명적 잠재력은 문자 시스템 내에서 구현될 수 없었다. 종이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 및 인쇄술의 발전, 공공 도서관과 공교육의 확산 등이 엮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명이 가능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종이 노트가 있었다.『쓰는 인간 : 종이에 기록한 사유와 창조의 역사』는 노트에 쓰는 행위가 개인적 경험을 공유 가능한 매체로 변화시키는 것을 넘어 필자의 사고와 작업 방식, 문화, 나아가 정치와 경제까지 바꾸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