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강과 국제 연대의 선순환
“한반도에서 ‘차가운 평화’는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힘의 균형에 의한 현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 356쪽
『좋은 담장, 좋은 이웃』은 대한민국이 혼돈의 시기에 생존과 번영을 위해 어떤 국가전략을 구사해야 하는지를 통찰력 있게 제시한 책이다.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저자는 한국의 안보와 통일을 둘러싼 핵심 쟁점을 12개의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풀어내며, 감정이나 이념을 배제한 ‘현실주의 외교’를 정식화한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은 제목에 압축되어 있다. ‘좋은 담장’은 주권과 규범이라는 분명한 경계를 의미하며, ‘좋은 이웃’은 그러한 경계 위에서 이루어지는 협력과 공존을 가리킨다. 저자는 담장을 허무는 순진한 외교도, 담장만 높이 쌓는 고립주의적 외교도 모두 위험하다고 본다. 오히려 명확한 담장을 세운 상태에서만 이웃과의 협력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국제적 권력정치의 역학을 외면하지 않되, 국제규범과 제도 속에서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절제된 현실주의’의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북한을 협상의 대상인 동시에 압박의 대상으로 규정하며, 억제와 대화의 병행이 가장 현실적인 대북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북핵 문제 역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라 관리가 우선되는 사안으로 보며, 비핵화는 장기적·단계적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북 제재는 해법 그 자체가 아니라 협상을 유도하는 지렛대라는 인식 또한 일관된다. 외교의 기본 축으로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분명히 하고, 이를 흔드는 시도는 현실성이 없다고 단언하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전략적 냉정함이 묻어난다.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도 저자는 명확하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의 균형, 즉 등거리 외교는 환상에 가깝고, 한국과 중국 관계는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영역으로서 이익과 규칙에 따라 관리되어야 한다고 본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역사 문제와 안보·경제 협력을 분리, 관리해야 국익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견국 외교의 조건으로는 원칙과 지속성을 제시하며, 외교의 도덕성과 국익 역시 충돌이 아니라 조율의 문제라고 정리한다. 무엇보다 정권 교체에 따라 180도 뒤집히는 외교로는 국제적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저자의 경고는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다.
이 모든 논의를 관통하는 저자의 전략을 자강(自强)과 국제연대(國際連帶) 개념으로 재해석하면 ‘자강과 국제연대의 선순환’으로, ‘좋은 담장’은 자강의 경계 설정을, ‘좋은 이웃’은 국제연대의 확대를 의미한다. 자강을 토대로 국제연대를 확장하고, 국제연대를 통해 자강의 비용과 위험을 낮추는 구조야말로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 전략인 셈이다.
다만, 저자가 상당 기간 한반도에 전혀 다른 두 국가가 공존할 현실을 인정하고, 부강하고 자존감 있는 대한민국 건설에 집중하는 것이 통일로 가는 문을 열어둘 수 있다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는 결과적으로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수용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며, 통일을 국가 목표로 유지하는 데 약화 요인이 될 수 있다. 통일은 독일의 사례처럼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올 수 있으며, 그 순간에 대비하지 못한 국가는 역사적 기회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만약 한국이 북한의 급변 사태 발생 시 통일에 대한 준비 부족과 국내 정쟁으로 분열된 모습을 보인다면, 통일 한국의 주체인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신뢰는 사라진 채, 미국과 중국이 또다시 분단의 고착화를 도모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한국(One Korea)’이라는 대전제 아래, 북한에 대한 억제와 대화를 병행하고,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국제사회의 협력을 확장해 나가는 노력은 대한민국의 숙명이다.
그럼에도『좋은 담장, 좋은 이웃』은 한국의 외교·안보·통일 전략을 둘러싼 진지한 논의와 생산적인 논쟁을 촉발하는 역작이다. 단순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국가전략을 둘러싼 사고의 틀을 정교하게 다듬어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정책 담당자뿐 아니라 시민사회 모두에게 일독의 가치를 지닌다. 혼돈의 시대일수록 분명한 담장과 성숙한 이웃 의식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메시지는, 작금의 한국 사회에 특히 무겁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