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 이미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전체메뉴

국회도서관 홈으로 책이야기 금주의 서평

금주의 서평

금주의 서평 상세보기 - 서평, 서평자, 발행사항에 관한 정보
서평 교제폭력과 교제살인, 그 구조를 부검하다
서평자 유성호 발행사항 786호(2026-07-15)

이처럼 친밀한 살인자 : 강압적 통제는 어떻게 관계를 지배하는가

  • - 청구기호 : 364.15-26-1
  • - 서명 : 이처럼 친밀한 살인자 : 강압적 통제는 어떻게 관계를 지배하는가
  • - 저자 : 허민숙
  • - 발행사항 : 김영사

목차

서문 마땅히 살아 있어야 했던 여성들에 대하여
1. 신고해도 바뀌지 않는 비극의 반복
2. 보이지 않는 감옥, ‘강압적 통제’
3. 그들은 어떻게 상대를 조종하는가
4. 피해자는 왜 벗어나지 못할까
5. 살인의 리허설, 목조름과 스토킹
6. 단 한 명도 잃지 않기 위하여

서평자

유성호(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

서평

교제폭력과 교제살인, 그 구조를 부검하다

“사망검토, 미래의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 ··· 이 제도는 단순히 사건의 결과를 통해 가해자를 체포하고 피해자를 애도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 189쪽  
 
󰡒헤어지자고 했을 뿐인데...󰡓교제살인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언론은 피해자의 마지막 말을 전한다. 연인 사이에서 시작된 통제와 폭력, 그리고 결국 살인으로 끝나는 이 비극적 
서사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그러나 낯설지 않다는 것이 이 문제가 제대로 이해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사건은 반복되고, 피해자는 계속 죽어 나가며, 공권력은 번번이 무기력함을 드러낸다. 국회입법조사처에서 오랫동안 여성폭력 문제를 연구해 온 허민숙 입법조사관이 펴낸 이 책은, 교제폭력과 교제살인을 ‘이상한 남자’와 ‘운 나쁜 여자’ 간의 우연한 비극이 아니라 예방 가능한 구조적 범죄로 분석한다. 그 주장은 학술적으로 정밀하고, 정책적으로 날카로우며, 독자에게는 때로 불편하리만큼 솔직하다. 
 
법의학자로서 필자에게 이 책이 각별하게 읽히는 이유가 있다. 부검대 위에 오르는 교제살인 피해자들은 대부분 단순 외력에 의한 죽음이 아니다. 오랜 기간 반복된 물리적 폭력의 흔적, 방어 자상, 저항의 흔적들이 신체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 수십 차례의 신고, 묵살된 구조 요청, ‘처벌을 원하십니까’라는 경찰의 형식적 질문 - 은 사망진단서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저자는 바로 이 빈칸을 채우는 작업을 한다. 
 
책의 전반부는 교제폭력의 핵심 메커니즘인 ‘강압적 통제(coercive control)’의 개념을 정밀하게 소개한다. 강압적 통제란 물리적 폭행에 선행하여, 혹은 그와 병행하여 가해자가 피해자의 일상 전반을 지배하는 행위다. 누구를 만날 수 있는지, 무엇을 먹어도 되는지, 심지어 씻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 - 저자가 책에서 소개하는 각서의 내용은 독자를 경악하게 한다. 이 강압적 통제야말로 살인의 가장 명확한 전조임에도, 한국의 법체계는 아직 이를 독립적인 범죄로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영국과 호주는 물리적 폭력이 없어도 강압적 통제만으로 가해자를 형사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을 이미 시행 중이다. 저자는 이 격차를 제도적 공백이 아닌 ‘국가의 무관심’으로 규정한다. 
 
책의 중반부에서 저자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피해자가 ‘결별을 시도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는 역설이다. 주변 사람들이 피해자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제발 헤어져" 
이지만, 통계와 실제 사례는 피해자가 이별을 통보하거나 신고를 감행하는 과정에서 살해 위험이 극적으로 높아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거절살인’이라는 개념으로 명명하며, 가해자가 피해자를 소유물로 인식하고 ‘거절’이라는 행위 자체를 처벌의 대상으로 여기는 구조적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라 분석한다. 이 분석은 교제살인을 충동적인 감정 범죄가 아니라 특정 신념 체계에서 예견 가능한 행동으로 재정의한다는 점에서, 수사와 사법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후반부에서 저자는 대안을 모색한다. 핵심은 ‘사망검토제(Domestic Homicide Review)’의 도입이다. 교제살인이나 가정폭력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가 이전에 어떤 기관과 접촉했고, 어느 지점에서 개입의 기회가 있었으며, 무엇이 실패했는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제도다. 영국은 이를 통해 반복되는 실패 패턴을 규명하고 정책을 개선해 왔다. 저자는 한국이 교제살인 피해자의 숫자조차 정확히 집계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정확히 몇 명이 사망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로 국가 통계의 부재를 비판한다.  
측정되지 않는 죽음은 예방될 수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가해자를 ‘괴물’로, 피해자를 ‘무력한 존재’로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가해자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특정 믿음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며, 피해자는 위험을 알아보지 못한 아둔한 사람이 아니라 구조적 공포 속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해온 사람이다. 이 프레임의 전환이 중요한 이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인식해야만 국가의 개입 근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입법조사관으로서의 저자가 가진 시선 즉, 수십 편의 보고서와 국회 토론회로 단련된 정책적 감각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부검을 통해 죽음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온 필자에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매우 익숙하다. 우리는 어떻게 죽었는가보다 ‘왜’, 그리고 ‘어떻게 막을 수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책은 그 물음에 대한 가장 성실한 답변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