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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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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인류의 욕망이 빚어낸 장벽의 이야기, 그리고 그 너머의 이야기
서평자 홍용진 발행사항 529호(2021-05-26)

장벽의 문명사 : 만리장성에서 미국-멕시코 국경까지, 장벽으로 본 권력의 이동과 세계 질서

  • - 청구기호 : 909-20-50
  • - 서명 : 장벽의 문명사 : 만리장성에서 미국-멕시코 국경까지, 장벽으로 본 권력의 이동과 세계 질서
  • - 저자 : 데이비드 프라이
  • - 발행사항 : 민음사(2020-10 )

목차

서장: 황무지를 막아선 벽

1부 건설자와 야만족

2부 위대한 장벽의 시대

3부 전환되는 세계

4부 상징들의 충돌

종장: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네 울타리를 허물지는 말라.”

서평자

홍용진(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부교수, 팡테옹소르본 파리1대학 역사학 박사)

서평

인류의 욕망이 빚어낸 장벽의 이야기, 그리고 그 너머의 이야기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투쟁할 수 있다. 그러나 문을 닫고 소파에 누워 물리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공간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기는 아주 쉽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장벽을(우리 지인들이 일깨우듯이 비유적 장벽을, 그러나 대부분은 실제의 장벽을) 세운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문명화되기를 기다린다. (pp. 362-363) 
 
동물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안정적인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한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과의 적정한 거리두기이며, 이는 특히 생활공간 확보라는 차원에서 경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경계를 표시하는 것, 그것은 나와 남을 구분하는 행위이자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에서는 이러한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석을 세우고 이를 신격화하기도 했는데, 이 신의 이름이 바로 테르미누스(Terminus)다. 버스 종점(터미널)이라는 말의 어원인 이 표지석은 내 생활공간의 끝 또는 한계를 나타낸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연적인 수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막대한 인구와 더불어 고도의 사회조직과 정치체를 이룬다. 그리고 본능의 수준을 넘어서 자신이 속한 사회조직이나 정치체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장벽을 만들어낸다. 문제는 이러한 장벽의 건설이 몇 가지 역설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삶의 안정을 바라는 마음에서 건설된 장벽은 이를 건설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의 삶을 가혹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장벽은 우리와 너희를 사뿐히 구분하는 공존의 기술이라기보다는 타자를 철저하게 배척하기 위한 분리의 도구로 기능하는데, 때에 따라서 장벽은 타자와의 새로운 만남과 교류를 이루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장벽 : 피와 벽돌로 이루어진 문명의 역사』가 원제인 본서는 장벽을 쌓아 올린 ‘문명’과 그 바깥에서 질주하던 ‘야만’이라는 구도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 기원전 4천 년 전, 시리아에 세워진 ‘트레롱뮈르(Tres Long Mur)’에서 1989년에 무너진 베를린 장벽까지 세계 각지의 장벽에 얽혀 있는 다양한 인간사와 여기에 스며든 욕망의 역사를 소개한다. 저자의 한결같은 관심은 장벽에 얽혀있는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복잡다단한 인간의 본성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섬세하게 관찰하는 데 있다. 
 
본서가 다루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장벽들, 그리고 그 장벽에 얽힌 무수한 사연을 한정된 지면에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주제들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이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주제는 역설적 공간으로서의 장벽이다. 선을 긋는다는 것은 분할과 동시에 접합을 의미하는 것처럼 장벽은 ‘따로’와 ‘함께’를 현실화한다.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의미하는 우리나라 말이 ‘나눔’이리라. 나눔은 분할(division)이자 공유(sharing)이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풍요와 안정, 질서를 만들어낸 ‘문명’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유목민들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약탈을 막아내기 위해 장벽을 만든다. 이렇게 해서 장벽 안의 사람들이 안정과 유약함, 노동이라는 특징을, 장벽 바깥의 사람들은 위험과 사나움, 전쟁이라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전자에게는 후자에게 기대할 수 없는 사회의 계층화와 전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사례처럼 장벽이란 평화를 의미하기도 했고, 한 무제 당시 장건의 서역기행이 보여주듯 유라시아를 이어주는 교역로 탄생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장벽은 정주민과 유목민 사이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지점이 되기도 했는가 하면, 정주민의 이동과 유목민의 정착이 이루어지는 지대를 형성하곤 했다. 
종종 강력한 권력자의 정치적 욕망을 구현했던 장벽은 당대에는 영원할 것 같았던 체제의 안정과 질서를 상징했다. 하지만 그 모든 장벽은 결국 자연의 풍화와 역사의 변화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이제는 희미한 흔적만이 남은 서남아시아의 유적들부터 수명이 가장 짧았던 베를린 장벽까지 모든 역사상의 장벽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안정을 확보하려는 지배 세력의 욕망은 망각과 짝을 이룬다. 20세기 말, 장벽의 일시적 성격과 비효율성을 지적한 고르바초프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직후부터 서아시아와 인도,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멕시코 국경에서 거대한 장벽이 들어서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서를 이끈 가장 강력한 동기가 인간의 두려움과 불안감에 대한 저자의 고민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번역본에 붙은 “장벽으로 본 권력의 이동과 세계 질서”라는 부제는 권력과 문명의 이동이라는 거창한 거시정치의 파노라마를 내세운다. 하지만 종장에서 토로하고 있는 저자의 고민은 안정과 안전을 보장하는 장벽 아래 이루어진 문명이 인간 본연의 야생성 또는 자연성의 희생 위에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현대인은 전근대 시기 초원을 누빈 유목민의 야생성을 회복할 수는 없으며, 그만큼 장벽은 각자의 마음에 들어서 있다. 이 장벽은 앞으로 어떠한 분할과 공유를, 즉 어떠한 ‘나눔’을 만들어낼 것인가? 글로벌 시대라 불리는 현재, 한 사회나 국가는 정치·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문을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본서에서는 누락된 한반도의 ‘장벽’은? 이처럼 장벽이라는 폐쇄성의 상징을 주제로 하여 독자를 열린 질문으로 이끌어가는 데에 바로 본서의 미덕이 들어있다.